타일러(Edward Burnet Tylor, 1832~1917)는 영국 인류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타일러는 옥스퍼드 최초의 인류학 교수였으며, 인류학 조직과 연구로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그의 사상은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촉발된 19세기 후반 지적 논쟁에 이바지했다. 동시대의 종교학자 막스 뮐러는 인류학을 '타일러 씨의 학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류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설립하는 데 타일러가 미친 영향을 인정한 것이다. 타일러의 핵심적인 업적은 문화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문화 또는 문명은 넓은 민족지적 의미에서 지식·신앙·예술·도덕·법·관습 및 사회의 성원인 인간에 의해 획득된 모든 능력과 습관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이다(Harris 1968: 18). 타일러는 그의 저서 《원시문화》(primitive culture, 1871) 서두에서 처음으로 기술적인(technical) 또는 인류학적 의미에서 근대적인 문화의 정의를 제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를 자세히 검토한 학자 스토킹(George W. Stocking, Jr.)은 타일러가 현대 인류학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타일러는 영국의 학자였으나 영국 사회인류학보다 미국 인류학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타일러에 대해서는 상충는 평가들이 존재한다. 타일러는 왜 당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의 사상이 가지는 인류학적 가치는 무엇인가?
1832년 태어난 타일러의 가족은 당시 확고한 영국 중산층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소수인 퀘이커교도였다. 따라서 타일러는 영국 국교회 신자에게만 학위를 주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는 입학할 수 없었다. 그는 가업인 주조소 사업에 참여하기 전까지 퀘이커교도들을 위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그를 불가지론으로 이끌고,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부추기게 되었다. 타일러는 20대 초반에 결핵으로 인해 가업을 정리하고 여행을 떠났는데, 쿠바에서 영국의 사업가이자 고고학자 크리스티(Henry Christy)를 만나 함께 4개월간 멕시코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타일러의 첫 저서 《아나우악 또는 멕시코와 멕시코인》(Anahuac or Mexico and the Mexicans, 1861)에 기술되었다. 타일러와 크리스티는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이나 촐룰라(Cholula) 등의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해 유물을 찾고 최근에 발견된 것과 비교하기도 했지만, 《아나우악》의 대부분은 과거보다는 당대의 멕시코 위주로 쓰였다. 타일러와 크리스티는 사탕수수 농장, 직물 공장, 용설란술(pulque) 가게, 대농장(hacienda)을 방문하였고 멕시코의 정치 불안과 빈곤에 대하여 기술했다. 이후 1865년 타일러는 《인류의 초기 역사와 문명의 발달에 대한 탐구》(Researches into the Early History of Mankind and the Development of Civilization)를 출간한다. 타일러는 사실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인류 초기 문화사를 귀납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보았으며, 선교사들의 기록, 민족지적 보고, 탐험가들의 일지 등을 활용하여 인류문화 사이의 유사성을 관찰했다. 타일러는 예술이나 관습, 신앙 등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에 대해 유사성은 독립적 발명의 결과이거나 사회 간 직접 또는 간접적인 접촉을 통한 문화 전파의 결과라고 보았다. 16년 후 타일러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진보의 존재와 그 경로를 증명하는 일련의 장들"로 《인류학》이라는 교재를 구성하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타일러는 초기 저작에서는 전파를 강조하였지만, 점차 진화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타일러의 본격적인 첫 민족지인 《인류의 초기 역사와 문명의 발달에 대한 탐구》의 절반가량도 언어와 상징의 진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후 타일러는 1860년대 후반에는 앨프레드 위리스, 토머스 헉슬리 등의 저명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고 주요 간행물에 논문과 서평을 기고했으며, 1871년 《원시문화》를 출판하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원시문화》에서 타일러는 인류문화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는데, 기록되지 않은 선사시대 인류의 역사를 알기 위해 유골과 석기 도구 등 고고학적 발견을 추적하였으나 선사시대의 문화나 문명을 복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타일러는 균일론(uniformitarianism)과 잔재(survivals)의 개념이라는 두 원리를 도입하여 인류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균일론의 핵심 논리는 인간의 사고가 비슷하므로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 살든,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문화의 과정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타일러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작용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인간사회는 진보에 의해 규정되고 문화는 진화로 표현되는 '거의 동일한 통로'를 따라 발전해 왔다. 인간문화의 진화에 대한 타일러의 재구성은 비교방법(comparative method) 잔재의 원리(doctrine of survivals)로부터 시작되었다. 비교방법은 비슷한 현상들이 역사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no, non, nein이라는 유사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것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역사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타일러에 따르면 잔재는 "과정, 관습, 의견 등이 습관의 힘으로 발상지와는 다른 새로운 상태의 사회로 전달된 것으로, 문화의 옛 상태로서 그로부터 새로운 문화가 진화해 온 증거이자 표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잔재'는 초기 인류문화에서부터 이어져 온 문화적 유형일 수 있다. 타일러는 잔재를 통해 발견한 '원시 미개성의 유물'을 통해 인류학자가 초기 인류의 문화유형을 재구성하고, 문화의 진화를 정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타일러는 인간사가 진보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했고, 최초의 인류학 교재인 타일러의 《인류학》(Anthropology, 1881)에서도 진보가 크게 강조되었다. 그러나 타일러의 진보 개념은 서구 과학의 원리를 기준으로 진화단계상의 상대적인 등급을 매겼다는 점에서 현대에 들어서는 비판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인류학》의 출간 이후 타일러는 새로운 저작을 내기보다는 인류학 교육과 연구소 및 학회의 육성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 인류학의 발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으며, 조사지에서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질문들을 개발했고, W. R. 리버스 등의 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타일러는 1909년 옥스퍼드에서 은퇴하고 1912년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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