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류학의 연구 분야와 대상은 시대의 기술적·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해 왔으며, 오늘날 의료인류학의 연구 주제는 스무 가지에 이른다. 의료인류학의 대표적인 관심 주제로는 질병의 정치경제학, 의료화와 생명정치, 전통의학과 의료다원주의가 있다. 질병의 정치경제학은 대부분의 의료인류학자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질병과 건강은 그 사람이 속한 정치·경제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의료인류학에서의 정치경제학은 한 사회의 물질적 부유함보다는,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요인들과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특성들을 의미한다. '후진국형 감염병'으로 널리 알려진 결핵은 질병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과거 한국에는 결핵 환자가 많았지만, 국가 차원의 대대적 결핵 관리 사업과 경제적 성장 속에서 발생률이 급격하게 줄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 사회에서 결핵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결핵 집단감염이 빈번하게 등장했으며, 대상자들은 주로 젊은 학생들이었다. 2000년대 한국의 깨끗한 환경이나 부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OECD(The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국가 중 한국에서 결핵 발생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과학적 사고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이 높은 결핵 발생률을 보이는 이유는 빈곤이나 불청결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규칙 생활 습관, 과로나 다이어트로 인한 면역력 저하이기 때문이다. 입시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인한 체력과 면역력 저하, 학원과 PC방 등 좁은 실내 공간 위주의 생활은 학생들의 결핵 감염률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하버드 의과대학의 교수이자 인류학자인 폴 파머(Paul Farmer)의 저서 《권력의 병리학》(2009)에 소개된 러시아 교도소의 결핵 환자들의 사례는 한국과 대비하여 질병의 정치 경제학적 측면을 비교문화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러시아는 사회적·경제적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이 당시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세르게이는 판결이 밀린 사건이 많은 탓에 구치소에서 1년 이상 재판을 기다려야 했다. 구치소의 위생 상태와 음식은 엉망이었으며 수감된 이들 중에는 결핵에 걸린 젊은이들이 아주 많았다. 세르게이 역시 결핵에 걸으며, 재판이 끝나자마자 결핵 치료소에서 1년간 치료를 받고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3년 후 세르게이는 결핵이 이전보다 심각한 상태로 재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르게이와 그의 담당 의사는 그가 치료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이는 약제가 부족하고 교도소의 관리가 불안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내려진 진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며 가중된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러시아의 의약품 재고는 고갈되었는데, 이는 의사들이 완치 판정을 서두르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임금 지급이 늦어지며 교도관들의 수감자 관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복합적인 정치·경제적 요인들로 인해 교도소 내의 결핵 관리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수감자들은 '규칙적이고 장기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이들의 질병은 '다제내성 결핵'으로 변화하였으며, 이들의 다제내성 결핵균은 교도소 내의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수감자들을 통해 주변의 가족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폴 파머 외에도 전 세계의 인류학자들은 정치경제학적 요인이 질병의 경험과 치유 과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질병의 정치경제학과 함께 의료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또 다른 주제는 의료화와 생명정치이다. 의료화(medicalization)란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이 전문가에 의해 '비정상' 또는 '질병'으로 개념화되어 의료적 개입이 필요한 대상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의료화를 통해 질병의 목록에 추가된 항목으로는 알코올 중독, 비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있다. 의료화 현상은 근대 이후 생명정치(biopolitics)라는 큰 맥락에서 이해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권력의 성격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것에서 근대 이후에 "살게 만들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생명권력(biopower)은 전문가적 논의와 판단을 통해 '정상'을 규정하고 개인과 사회를 '더 정상에 가깝게' 되도록 강제하고 장려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 요소가 된 것은 생의학(biomedicine)으로, 생의학에서는 신체의 구조와 기능의 정상·비정상의 구별을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한다. 이는 질병을 생물학적 분류에 따라 구분하게 하고, 의사들이 환자보다 몸이라는 물질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게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료화의 한 사례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의 등장을 살펴보자. 의료인류학자인 앨런 영(Allan Young)의 저서 《착각들이 만들어낸 조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발명》(The Harmony of Illusion: Inventing Post-Traumtic Stress Disorder)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1970년대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결정하였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비판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미국 군인들은 패배한 채 귀국하였고, 일부 군인들은 분노와 죄책감 등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렸다. 파병에 반대했던 미국의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사회복지사들은 국가가 후유증을 겪는 군인들에게 마땅한 대우와 보상을 해 주지 않는 것에 분노했고, 참전 군인들의 고통을 널리 알려 이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참전 군인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의도치 않게 참전 군인들을 '환자'로 규정지었다. 1980년 PTSD는 공식적인 정신장애 진단목록(DSM)에 추가되었으며, 'PTSD'로 진단받은 이들은 '환자'로서 국가에 의료보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참전 군인이 겪는 심리적 고통의 의료화는 고통받는 군인들이 국가나 의료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지만, 동시에 그들의 상태를 '비정상' 또는 '질병'으로 규정짓게 하기도 했다. 의료화는 현재에도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통을 이해하고 경감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의료인류학자들은 더 많은 의료화의 사례들을 연구하고 비교하여, 의료화를 깊게 이해하고 보다 효과적인 정책을 구상하는 데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전통의학과 의료다원주의 또한 현대 의료인류학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어 온 분야이다. 의료인류학이 인류학의 하위 분야로 완전히 자리 잡기 전부터 인류학자들은 토착 사회의 의료 체계에 대해 기록하고 연구해 왔으며, 이러한 의료지식 체계를 '민족의학'(ethnomedicine)이라고 부른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민족의학이 근대 의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늘날의 많은 인류학자들은 생의학을 포함한 모든 의료체계가 특수한 문화적 환경에서 발달한 민족의학의 일종이라고 여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질병의 정치경제학, 의료화와 생명정치, 전통의학과 의료다원주의는 전통적인 의료인류학의 연구 분야이다. 최근의 의료인류학자들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초국가적 이동,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아래 인간의 존재 조건과 공동체적 삶의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현정(2018). 현대문화인류학 14장 몸과 아픔에 대한 비판적 탐구와 실천. 형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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