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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의료인류학 - 개념과 역사

by seawworld 202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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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아픔, 질병에 대한 인식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어 왔다. 몸에 대한 관념이나 사용 방식은 사회마다 가진 인식론과 세계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또한 한 사회 내에서라도 역사적·지리적 변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50년대 한국 사회에서 배가 나오고 대머리인 남자는 부유층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 관리에 소홀한 사람으로 생각되기 쉽다. 아픔과 질병에 대한 인식 또한 시간적·공간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사회에서는 출산의 고통이 새로운 생명 탄생을 위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가능한 한 산모의 건강을 위해 피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질병은 생의학적 관점에서 신체 구조나 기능이 비정상적인 경우를 의미하지만, 무엇을 '비정상'으로 판단할 것인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산만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면, 오늘날에는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로 진단받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몸과 아픔에 대한 인식과 경험, 의미는 역사적·지리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했으며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함께 변화해 왔다. 의료인류학에서는 이러한 몸과 아픔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탐구를 추구한다. 인류학의 한 분과 학문인 의료인류학(medical anthropology)은 인류학적 방법과 성취에 기대어 인간의 질병, 건강, 치유 및 의료체계를 연구한다. 의료인류학은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고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아우르는 넓고 다양한 학문 분야와 연결되어 있다. 의료인류학의 핵심 개념과 연구 방법의 상당수는 역학, 유전학, 의학사, 윤리학, 임상의학과 정신의학의 도움을 받아 탄생하였다. 또한 의료인류학은 순수학문인 동시에 실천적 목표를 추구하는 응용학문이다. 의료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인간', '생명', '윤리'의 개념과 의미에 대한 이론적 질문을 제기하는 한편 임상 치료 효과를 높이고 사회 건강을 증진하려는 실천적 목표를 추구하는 응용인류학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의료인류학이 학문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50년대부터이지만, 그 이전부터 의료인류학의 학문적 경향성이 존재해 왔다. 특히 체질인류학자의 연구들, 비서구 의료에 대한 전통적인 민족지적(ethnographic) 관찰, 1930년대 후반 이후의 통문화적 정신의학(cross-cultural psychiatry),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적극적인 국제보건 활동이라는 네 가지 인류학적 전통 속에서 의료인류학의 시작점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네 가지 전통은 의료인류학의 등장 이전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였으나 의료인류학의 확립 이후 그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다. 체질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이란 생물 종으로서 인류의 변이 과정과 진화, 적응을 연구하는 분야로, 고인류학, 뼈대생물학, 영장류학 등이 이에 포함된다. 최근에는 진화이론과 유전학이 발달하며 분자 수준까지 연구 영역이 확대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생물인류학(biological anthropology)이라는 용어로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초기 체질인류학자들 중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던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성장이나 영양 상태, 체격, 빈혈, 당뇨병 등 의료적 관심사를 의사들과 공유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의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이 현재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실에 참여하거나 생의학(biomedicine)에 기여하는 체질인류학자들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비서구 지역의 의료에 대한 전통적인 민족지적 관심은 '민족의학'과 관련이 있다. 20세기 초 인류학자들이 비서구 사회에서 현지조사(fieldwork)를 시작하면서 현지 사회의 정치체계, 경제활동, 종교 의례와 더불어 질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 방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특히 영국의 내과 의사이자 인류학자였던 윌리엄 리버스(W. H. R. Rivers)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저서 《의료, 마술, 종교》(Medicine, Magic and Religion)에서 토착 의료체계는 다른 사회제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제도로서 인류학의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하며, 토착 의료는 현지인의 관점에서 합리적임을 강조했다(Rivers 1924). 그러나 리버스는 비서구 사회의 의료는 원시적인(primitive) 것이며 종교나 마술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등 서구와 비서구를 차등적으로 바라보는 서구 인류학적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 의료인류학에서는 상이한 의료 체계를 차등적으로 보는 것을 지양하며 근대 생의학도 여러 의료 체계 중 하나로 다룬다. 1930년대 이후 인류학자와 정신의학자의 정신의학에 대한 공동연구 또한 현대 의료인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는 20세기 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Carl Gustav Jung)과 함께 인류학 내에서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속한 '문화와 인성학파'의 연구가 크게 작용하였다. 문화와 인성 학파 학자들은 성인의 인성(personality)이 생물학적·유전적 요인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또한 인류학자들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정신 현상 사례에 대한 비교문화적 연구를 통해, '문화의존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라는 새로운 정신의학 분류체계의 범주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의 '화병'(hwabyeong)도 문화의존증후군 중 하나로 여겨졌었다. 이처럼 의학적 지식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도 의료인류학의 주요 연구 분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보건기구가 설립되고 개발도상국에서 대규모 공중보건 계획이 시행되면서 국제보건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건 종사자들은 단순히 선진국의 보건 정책을 이식하는 것만으로는 개발도상국의 의료 수요를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장 경험을 통한 인류학적 지식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 1950년대에 보건대학과 스미소니안 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활동하던 인류학자들, 남미 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던 국제보건전문가들이 함께 의료인류학을 창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료인류학자들의 연구와 지식은 국제보건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인류학적 전통들은 1950년대 의료인류학의 이름 아래 통합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인류학의 중심 하위 분야로서 자리 잡았다. 이후 1980년대에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으며 최근에도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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