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류학은 법과 법체계 등 법과 관련된 현상을 비교문화적으로 연구하는 인류학의 하위분야이다. 법이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인류학이 연구하는 사회의 제반 현상에 법이 포함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류학의 선구적인 연구 업적으로 꼽히는 문헌 중에 법적인 현상을 주제로 다룬 것들 또한 적지 않다. 원시사회 또는 소규모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사회의 규칙이나 관습, 원리, 도덕률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헨리 메인(Henry Maine)의 《고대법》(Ancient law)이나 루이스 헨리 모건(Lewis Henry Morgan)의 《고대사회》 (Ancient Society)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연구들이다. 법인류학은 문화현상으로서의 법 또는 법의 문화적 맥락을 연구하는 것이 주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학자들이 법과 문화의 관계를 논할 때 취해온 접근방식은 법과 문화를 독자적 영역으로 보고 양자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과 문화가 서로 독자적, 자율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법은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가 되어 문화에 영향을 주고, 문화 역시 법 테두리 안에 스며든다고 보는 구성적 접근에서는 법과 문화 간의 구성적 관계(constructive relationship)에 주목한다. 법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구성적 접근에서는 법과 문화의 관계가 상호작용적이고 역동적이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1966년 미국연방대법원 판결에서 유래한 '미란다 규칙'(Miranda rule)은 최근 폐기에 대한 논의에 둘러싸였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연방대법원은 미란다 원칙이 경찰의 일상적 관행이 되었으며 나아가 '미국문화의 일부'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음을 확인하였다(Dickerson v. U.S., 2000). 즉 판례가 관행으로 자리잡으며 문화의 일부로 재생산되었고, 그 결과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로써 법과 문화 간의 구성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법인류학은 법과 문화의 구성적 관계에 주목한다. 그런데 법이 문화 현상의 주요 부분 중 하나라면 법은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는 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알프레드 래드클리프-브라운(Alfred R. Radcliffe-Brown)은 법을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힘의 체계적인 작용에 의한 사회통제"라 정의하였다. 아담스 호블(E. Adamson Hobel)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권력 행사의 특권을 가진 개인 또는 집단에 의한 물리력의 적용에 의해 그 위반이 제재되는 사회규범"으로 법을 정의했다. 이들의 입장은 규범이 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조직화된 권위와 강제력이 수반된 규범이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편 브로니슬라브 말리노브스키(Bronislaw Maliinowski)는 법은 "구속력이 있는 의무로 여겨지고 행해지는 모든 규칙"이라고 봄으로써 법을 넓게 정의하였다. 이처럼 법을 정의하는 것은 근본적이면서도 매우 난해한 문제이다. 법인류학의 이정표적인 저작으로는 말리노브스키의 《미개사회의 범죄와 관습》을 들 수 있는데, 말리노브스키는 현지조사를 통해 공식적 법 제도를 갖추지 못한 사회에서도 법적 기제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기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트로브리안드 사람들 현지조사를 통해 개인이 집단의 규범을 무조건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닌 매우 복잡한 심리적, 사회적 유인에 기반하여 준수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말리노브스키는 법을 "구속력 있는 의무로 여겨지고 행해지는 모든 규칙"으로 정의하고 구속력의 본질과 구속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집중하여 규칙을 조사하고 분석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말리노브스키는 규칙들이 실천되는 방식에 주목하여 원시적 규칙 체계의 문화맥락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말리노브스키의 접근방식과 방법론은 민족지 중심의 법인류학의 연구 방향의 이정표가 되었다. 민족지적 연구 사례들이 축적되면서 이후에는 재판 사례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가 등장하였다. 영국의 인류학자 막스 글럭먼(Max Gluckman)은 잠비아의 로지(Lozi) 부족사회 연구에서 현지조사를 통해 토착법정의 심리 과정에 대한 최초의 민족지적 기술을 하였다. 그는 토착법정의 재판관들이 당사자들의 행위를 판단할 때 그들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기대되는 행위를 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치 당시 영국 법정에서 판사나 배심원들이 '합리적 인간'(reasonable man)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로써 원시인의 법적 사고가 발전된 영국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문화가 사법 결정 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법인류학적 재판 연구의 주요 주제가 되었는데, 이는 법정언어의 분석을 통해 연구되었다. 존 콘리(John Conely)와 윌리엄 오바(William O'Barr)는 언어인류학적 방법으로 법정 담화를 분석하여 법정언어를 '힘있는 말'(powerful speech)과 '힘없는 말'(powerless speech)로 유형화할 수 있고, 이는 화자의 권력관계 또는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배심원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법 다원주의, 다문화국가의 법과 문화 간의 충돌, 인권 등을 법인류학의 연구 쟁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인류학에서의 법에 관한 연구는 법이 무엇인가, 법이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 등의 거시적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에는 보편적 법규범과 지역적 법규범의 충돌과 같은 현대적 문제상황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인류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리인류학 - 인간 심리와 사회문화적 환경 (1) | 2024.09.04 |
---|---|
언어인류학 - 언어, 문화, 사회의 상호작용 (5) | 2024.09.03 |
정치인류학 - 정치권력에 대한 문화적 상상 (0) | 2024.08.23 |
경제인류학 - 경제적 인간, 실체론적 경제, 도덕경제 (0) | 2024.08.20 |
인류학에서의 가족과 친족 (0) | 2024.08.15 |